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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단상

살인자의 기억법 - 김영하

by mathpark 2019. 5. 7.

◆ "(…) 하긴 시 말고도 인생에는 남에게 배울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지요."



◆ 우연은 불운의 시작일 때가 많지.



◆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



◆ 죄책감은 본질적으로 약한 감정이다. 공포나 분노, 질투 같은 게 강한 감정이다. 공포와 분노 속에서는 잠이 안 온다. 죄책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나는 웃는다. 인생도 모르는 작자들이 어디서 약을 팔고 있나.



◆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일이 없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 하니 자꾸 예수 믿느냐고 묻는다.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 술만 마시면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다 잊어버리는 동네 사람이 있었다. 죽음이라는 건 삶이라는 시시한 술자리를 잊어버리기 위해 들이켜는 한 잔의 독주일지도.



◆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우연히'라는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 언제나 그랬듯이 언어는 늘 행동보다 느리고 불확실하며 애매모호하다.



◆ 젊은이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좋다.



◆ 몰입은 위험한 거야. 그래서 즐거운 거고.


『살인자의 기억법』은 최근에는 보기 드물어진 '남성적' 소설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것은 이 소설이 연쇄살인범을 내세워 피와 폭력을 불러들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소설이 함축하는 성숙한 남성의 체험의 형식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리가 가진 어떤 계획 의지 열정도 그에 합당한 결말이나 보상에 이르지 못하리라는 체념, 우리가 조금씩 밀고 나가는 삶의 궤적이 결국에는 불완전한 형태로 끝나버리고 말 것이라는 우울한 예감, 우리를 감싸고 있는 세계와 운명에 어떤 내재적 의미도 없으며 그저 부조리의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갈 뿐이라는 어렴풋한 인식, 이 어렴풋한 인식을 무자비할 정도로 철저하게 만드는, 우울한 예감을 현실로 드러내는, 체념들로 충전되어 있는 체험의 형식, 그러므로 성숙한 남성성의 형식은 인생이 우리에게 던지는 어떤 기미들 혹은 미끼들에 지나치게 진지해지지 않는 미덕을 갖고 있다. 성숙한 남성은 달콤한 결말에 집착하거나 안달하지 않고 쓰디쓴 결말에 좌절하거나 원한을 갖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권태와 무기력에 빠지지도 않는다. 어리숙한 남자들만이 혼자서 심각한 체하다가 미끼에 속아서 뭔가를 잔뜩 기대하며 부풀어놓고는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인생을 저주하다가 얼마 안 가 다시 미끼를 문다. 그런 자들은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사이에 무기력한 퇴물로 늙어간다. 성숙한 남성이 보기에, 인생은 어떤 심오한 계획도 감추고 있지 않고 어떤 믿음직한 약속도 해주지 않는다. 인생은 우리에게 그저 섬뜩하거나 짓궂은 농담을 던질 뿐이다. 인생은 농담을 던지고, 남자는 웃음으로 응수한다. 순수하게 유쾌하지만은 않은 그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자가 성숙한 남성이다. - 권희철(문학평론가)



◇ 마지막 문장은 앞에 써놓은 그 어떤 문장에도 위배되지 않을 문장이어야 한다. - <작가의 말> 中


★★★★☆ 오랜만에 만난 몰입도가 높은 한국 '남성'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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